서론
양규는 고려시대의 무신으로, 제2차 고려-거란 전쟁에서 크게 활약한 인물이다. 고려시대 때 가장 암울했던 제2차 여요전쟁의 진주인공이자 순수 그의 능력으로 고려의 멸망을 막아낸 구국의 영웅이기도 하다. 그의 일대기를 보면 역사 속에 가려져서 우리가 잘 몰랐을 뿐이지 가히 성웅 이순신과 비견될 만큼 엄청난 사람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흥화진 전투
양규가 활약한 흥화진 전투는 1010년에 일어난 전투로, 고려와 거란 사이의 전쟁에서 판도를 바꾸는 역할을 했다. 흥화진은 서희가 거란과 담판하여 강동 6주를 확보한 이후, 995년에 구축한 압록강 방면의 요충지를 말한다. 거란은 흥화진을 선점하기 위해 고려 현종 대에 수 차례에 걸쳐 침입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1010년, 1017년, 1018년에 전투가 벌어졌다.
1010년에는 거란의 요 성종이 40만이라는 말도 안 되는 거대 병력으로 압록강을 건너 최전방의 고려군 요새인 흥화진을 포위하자, 양규는 서북면 도순검사 겸 형부낭 중으로서 진사 겸 호부낭중 정성, 부사 겸 정작주부 이수화, 판관 겸 남희령 장호 등과 더불어 3000명의 병사와 함께 성을 굳게 지키며 완강히 저항하고 항복 권유를 물리쳤다. 이에 거란군은 답이 없는 흥화진을 포기하고 포위를 풀어 통주에서 강조가 이끄는 고려의 주력 부대를 격파한 뒤 남하하기에 이른다.
흥화진 전투 이후 활약
1010년 11월 23일, 거란 성종은 흥화진을 함락하지 못하고 20만 군대를 이끌고 남진을 결정하게 된다. 이를 알게 된 양규는 흥화진에서 700명의 기병 별동대를 이끌고 통주성으로 향했고, 통주성에서 잔류하던 고려군 1000명을 더 모아 요나라군이 함락했던 곽주성을 탈환한다. 고작 1700명의 병사로 곽주성을 6000명의 거란 수비군을 몰살시키고 성을 탈환한 것을 어떤 방식이었는지 자세히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말도 안 되는 결과로써 여요 전쟁 전체를 통틀어 가장 극적인 승리라고 보인다.
그 후 양규는 보급로도 끊기고 지칠 대로 지친 거란군에서 지속적으로 타격을 입혀 출혈을 만들어내고 동시에 고려 백성들을 최대한 많이 구출해 냈다.
영화 같은 최후
양규의 최후는 영화 그 자체다. 양규는 1011년 1월 28일 거란군 한 부대가 접근한다는 정보를 듣고 요격새 1000명의 수급을 베었다. 근데 이는 야율융서가 직접 이끄는 거란군의 최정예본대였으며 이들은 양규 부대를 포위한다.
양규는 야율융서의 친위 군을 맞이해 병사들이 다 쓰러질 때까지 말 그대로 처절하도고 처절하게 싸웠고 마침내 전사하고 말았는데, 내막을 들여다보면 그는 철수하는 거란군에 세 최대한 타격을 입혀서 앞으로는 쉽게 고려를 넘보지 못하게 하려 했었고 그 속에는 구출한 고려 백성들에게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싸움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끝까지 고려를 생각하고 백성들을 생각하다가 전사를 한 것이다.
업적 정리
①당대 최강대국이었던 거란 제국 전성기 최고의 황제였던 성종 야율융서가 친정한 대군 400,000명의 공격을 고작 3,000명의 군사로 막아내어 흥화진을 수성하는 데 성공한다.
②휘하의 날랜 용사 1,700명을 차출한 뒤, 그들을 특공대로 삼아 약 6,000명의 거란군이 지키고 있었던 곽주성을 공성하여 함락시킴으로써 적의 보급로를 정말 차단시킨다.
③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하던 거란군의 유목민 부대를 상대로 1개월간 7번의 전투를 치러 모두 승리하고, 적병 수천 명 이상을 죽임과 동시에 고려인 포로 30,000명을 구출해 낸다.
④양규와 그의 부대가 이룬 죽음을 불사한 활약 덕분에 고려는 이후 기사회생하여 제3차 여요 전쟁 땐 한국 야전 역사상 가장 완벽한 승리라 평가되는 귀주대첩의 신화를 쓸 수 있었다.
그 결과 요나라와 경쟁하던 여진족에 대한 종주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여 마침내 독자적인 세계관을 확립한 제국으로 발돋움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100년 이상 큰 전쟁이 없는 평화시대에 중세 동아시아의 균형자 국가로 우뚝 서게 된다.
평가
양규는 고려의 지휘관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인물이었다. 특히 야전에서의 그의 활약은 마치 현대의 특수전을 방불케 하듯 소수의 특공대로 인질을 구출하고 게릴라전으로 승리를 거두며 전공을 세워나갔다. 그리고 국가가 멸망하는 위기의 상황에서 소수의 병력으로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거란군의 후방을 끊임없이 교란하고 많은 적병을 주살한끝에 거란군을 후퇴시켰고, 끝까지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서라도 고려 백성들을 구출했던 모습은 흡사 성웅 이순신을 보는 것과 같다고 평가 내릴 수 있겠다.
영상
결론
양규는 책임감이 강하고, 용기와 인내심이 뛰어난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는 뛰어난 전략가이자 지휘관이기도 했다. 그의 업적이 없었다면 아마도 고려는 제2차 여요 전쟁에서 멸망했을 것이라는 게 역사학자들의 정론이다. 고려 백성들에게는 누구보다도 인자했지만 적인 거란군에게는 죽음의 사신과도 같았던 양규는 고려에 대한 충절과 애국심으로 고려의 국난을 극복한 인물이다.
이제라도 많은 사람들이 고려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고, 양규라는 위인에 대해 기억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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